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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탬] 우유는 조금 더 미지근하게 01

민호 형과 한 아파트에서 동거하며 지낸 지도 어느덧 6개월이 다 되어간다. 민호 형의 강요 아닌 강요에 이곳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참 빨리 가고 있었고, 서툴렀던 형과의 동거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익숙해져 가는 것은 오로지 반복되는 생활방식뿐. 아직 나는 불편하고 어색했다.






"음…. 태민이 일어났어?" 






매번 일찍 먼저 일어나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나의 등 뒤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머리 위로 느껴지는 그의 커다란 손. 천천히 부드럽게 머리를 쓸고 지나가는 그의 손짓에 나는 설렌다. 빨라지는 심장박동수를 내리기 위해 천천히 호흡하고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실수하면 안 되니까. 실수하기 싫으니까. 등 뒤에 서 있던 형을 마주하러 몸을 돌린다. 그리고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환하게 웃는다. 






"형, 오늘은 일찍 일어나ㅅ..."






너무 갑작스러운 형의 행동에 실수하지 말자를 백번 넘게 곱씹던 나는 굳어진 표정과 동시에 얼어버렸다. 볶음밥을 만들고 있던 프라이팬을 등진 체 형에게 말을 하던 찰나, 그는 자신의 왼손으로 나의 긴장한 오른쪽 어깨를 감싸고 다른 남은 오른손으로 나의 등 뒤, 볶음밥과 같이 노릇노릇 잘 구워지고 있던 소시지를 하나 집에 자신의 입속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는 단지 소시지를 먹으려 한 행동이었지만 나에게는 포옹과도 같은 스킨십으로 느껴졌다. 아 형, 이건 반칙이라구요.

검지와 엄지에 묻은 기름을 쪽쪽 빨곤 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오늘 지현이가 같이 아침 먹자고 해서."

"아..."

"태민이 너도 같이 갈래?" 






예전부터 그랬다. 사람 설레게 기대하게 해놓고선 이렇게 자기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사람을 민망하게 만든다. 물론 나보고 설레라고 기대하라고 한 적 없기 때문에 혼자 멋대로 생각한 내가 멍청한 거겠지. 그래도, 






"저는 그냥 집에서 먹을게요. 지현이 누나가 서운하게 생각하겠어요." 






나도…. 서운하다구요. 

매번 야근 때문에 밤늦게 들어오는 민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일찍 일어났었다. 혹시나 아침을 못 먹을까 봐. 거르지 말라고 그보다 30분 먼저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줬었다. 하지만 그런 내 정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매번 오늘은 바빠서 그냥 가야겠다며 다음에는 꼭 같이 먹겠다며 아무 의미 없는 빈말만 남겨두고 나갔다. 이제 반년이나 같이 살았기에 알게 되었지만 그의 부드럽고 너무나도 상냥한 말들은 미안함에 생각 없이 내뱉는 빈말들이 많았었고, 알면서도 매번 속는 나에게는 그런 그의 말들이 희망 고문으로 남아있다. 어쩐지 일찍 일어났다 했어. 나는 어제 아침 매일 습관처럼 해줬던 "내일은 꼭 같이 먹자"는 그의 말을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매번 당하면서도. 






"지현이가 왜 서운하게 생각해?" 

"그야, 오랜만에 만나는 거잖아요. 제가 눈치 없이 따라가면 싫어하지 않을까 해서요."

"..."

"그것도 오랜만에 데이트인데…."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듯 바닥을 보며 서 있던 그는 멋쩍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우리 지현이는 그런 애 아니야.오히려 너 오랜만에 봤다고 좋아할걸?" 






젠장, 괜히 말했다.











"진짜같이 안 갈래? 방금 지현이한테 물어봤는데 자기는 신경 안 쓴다고..."

"저 정말 괜찮아요."

"..."

"아... 그리고 저 어차피 밥 먹고 밖에 나갔다 올 거라."

"혼자서 나간다고?"

"잠시라서 괜찮을 거예요. 새벽이라 사람들도 많이 없으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의 눈빛 때문에 나는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눈빛을 피하려 고개를 내렸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그는 내가 혼자 나가는 게 두렵고 자신 없어 하여 그러리 하고 생각하며 무릎을 굽혀 나에게 눈을 마주친다. 한 손은 내 머리 위로 올린체. 따듯한 그의 손의 온기가 머리 위로 전해지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너무나도 포근하게 나를 바라봐주는 그의 눈빛에 순간 울컥했다. 살짝 눈물이 고인 게 보였는지 그는 더욱더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를 마주했고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 나의 뺨을 감쌌다. 어린 아기들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 미안함에 당황해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괜찮다고 다독여주면 서러워 더 울듯, 민호 형이 괜찮으냐며 나의 뺨을 어루만져주는 손길에 더욱더 눈물이 나려고 했다.






"태민아, 힘들면 너무 재촉하지 마. 나중에 천천히 노력해보자. 응?"

"..."

"나중에 해도 안 늦어. 너무 조바심 갖지 말고."

"...늦겠어요, 형. 이만 가보세요."

"..."






뺨을 감싸고 있던 형의 커다란 손을 잡아다 내리곤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정말로. 무슨 일 생기면 형한테 바로 전화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바로 와줄 거잖아. 그렇죠? 나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푸흐흐 하며 바람 빠진 소리로 웃는다.






"그래, 꼭 전화해. 걱정하게 하지 말고.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꼭 문자하고."

"네."

"아 그리고,"

"..."

"나중에 집으로 선생님 오실꺼야. 이제 조금씩 공부 시작해야지."

"아, 네..."

"자, 이거 들고 가."






갑자기 나의 손을 잡아다 자기 쪽으로 끌더니 핑크색 우산을 올려준다. 나중에 밖에 나간다고 걱정해준 걸까. 아침을 만든다고 비가 오는지 몰랐었다. 어쩜 형은,






"이거 지현이꺼니까 조심히 써라."

"...아."

"아까 지현이한테 물어본다고 전화했을 때 비온다고 우산 꼭 챙겨가래."

"..."






어쩜 형은…. 이래요? 우산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밖에 나가서 잃어버릴까? 아니면 누군가 와서 훔쳐 가던지 그래 줬음 좋겠다. 형이 많이 화낼까? 지현이 누나도 기분 나빠할까? 잃어버린 거에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기 우산을 쓰고 있다는 점에 화나겠다. 아닌가, 순하디순한 지현 누나는 오히려 나를 걱정해줄까? 형만 모르고 있어요, 알아요?

나와 형은 무대 위에 서 있다. 나는 하루에 몇십 번씩 그를 향해 방백을 한다. '좋아해요. 좋아해. 나 좀 봐줘요.' 방백이기에 몇십 번 몇천 번을 외쳐도 그는 듣지 못한다. 하지만 제삼자, 무대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다 듣고 있고 알고 있다. 나는 그게 더 싫다. 날 배려해준다고 위해준다고, 자신은 다 이해한다는 듯이 오히려 입 닫고 있는 그녀의 모습. 정말 그녀는 악의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게 아니어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민호 형 여자친구 아니랄까 봐...






"갔다 오세요 형."

"그래, 꼭 연락하고."

"네."






검은 정장에 살짝 올린 앞머리를 한 민호 형이 웃으며 입을 벌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다. 꼭 연락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형을 태우고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 은 닫혔다. 잠깐 멍하니 서 있다 아직 손에 들려있는 핑크색 우산을 바라보았다. 계속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정도로 색이 밝다. 핑계 삼아 쓰지 말아야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보통 사람들이 동네 앞 편의점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타 10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들려 원하는 물건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힘들지 않다. 편의점에 들려 원하는 우유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딱 14번째 손에 있는 땀을 닦았다. 고집을 부려 지현이 누나의 우산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감기 걸리는 건 질색이라 어쩔 수 없이 쓰고 나왔었다. 한 손에는 우유를, 한 손에는 우산을 쥐고 있었던지라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 우유를 든 손을 바꿔가며 바지에 문질러 데었다. 집에서 편의점으로 갈 때는 비도 많이 내리지 않았고 날씨도 그렇게 덥지 않았는데, 그래서 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갔다. 20분 이상을 더 소비했지만 갑갑한 버스를 타고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달랐다. 빗물도 조금 더 굵어졌고,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조금 더 더워진 날씨에 비와 30분 동안 씨름하며 집에 도착했을 때엔 우유가 상해있을 거 같았거든.

나의 증세는 광장공포증이었다. 심하진 않았으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큰 공간이거나 갑갑한 버스, 지하철, 비행기 같은 좁은 공간에 오래 있지 못한다. 지금처럼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시간대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최대시간이 30분이었었지. 멀리서 오는 버스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 번 손에 있는 땀을 바지에 닦는다. 어느새 나의 손은 파랗게 물들여 있었다.






'띡-'

"장애인입니다."






카드를 찍고 자리를 찾으려는 순간 오랜만에 들어보는 '장애인' 소리에 새삼스레 놀랬다. 그리고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 옆으로 고개를 들어 버스 기사 아저씨와 눈을 마주쳤다. 민망함에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저씨의 목소리.






"저기 학생 미안한데"

"..."

"내가 보기엔 어디 아픈 것 같진 않은데 카드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러지 맙시다."

"..."

"학생 돈 벌기 힘든 거 아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야. 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 되지."

"아…. 죄송합니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아.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지며 동전을 찾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달달 떨리기 시작한다. 아, 빨리…. 빨리 찾아야 하는데. 떨리는 손 때문에 쥐고 있던 우산과 우유는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땀 때문에 끈적한 손이 주머니에서 잘 나오질 않아 무작정 잡아당겼던 팔에 손에 쥐고 있던 동전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제야 바닥에 내팽겨져있는 우산과 우유를 본 나는 무릎을 꿇어 재빨리 주웠다. 재촉하는 아저씨의 눈빛이 느껴져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동전을 하나하나 집었다. 연신 '죄송합니다.' 중얼거리며 동전을 넣고 자리에 앉은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화끈거리는 얼굴과 눈시울까지 붉어지는 느낌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 하나하나 꽉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긴장하면 나오는 나의 습관이었는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한 거 같아서. 픽하면 붉어지는 얼굴에 긴장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손이 벌벌 떨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지금 내 모습은 마치.






"병신같아…. 이태민 병신."






눈물이 톡하고 울퉁불퉁 성이 난 모습의 우유곽에 떨어진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창밖의 거리에 눈을 돌렸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물 때문에 거리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톡톡톡 거리는 빗물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볼을 시키기 위해 우유곽을 대보지만 이미 더위에 데워진 우유는 미지근할 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엔 비가 멈춰있었다. 찰박찰박 아직도 아스팔트 위에 남아있는 빗물 위로 걸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무 힘도 없이 마냥 바닥만 바라보고 걸으며 생각한다. 앞으로 몇 주 동안 버스 타지 말아야지. 얼마나 걸어 왔을까 아파트 입구까지 도착한 나는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엘리베이터에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동안 아까부터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을 의식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워낙 정신이 없었던지라 누가 뒤에서 오고 말고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아파트 상가로 들어와서부터 의식하기 시작했고 우연이라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심지어 같은 아파트 건물로 들어와 나의 뒤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나는 자각했다. 이건 뭔가 좀 이상하다고.






"태민 학생?"

"으어…. ㅇ예?"






이 아파트 주민인지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나의 이름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요?






"아, 태민 학생이 맞네."

"..."

"오늘부터 홈스쿨링 선생을 맞게 된 김종현이야."

"...아."

"반갑다."






매우 간결한 인사였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알게 된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톤과 둥글지만, 끝이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사람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그의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어느 무리에서도 '리더'라는 직위가 제일 잘 어울릴 정도로.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그의 포스에 빠져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던 그는 피식 웃으며 특유의 중저음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인사 안 받아 줄 건가?"

"아, 아니요!!" 






당황한 나는 황급히 오른손에 들려있던 우산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모습과 달리 따듯했던 그의 손은 단단하면서도 안정되었다. 눈치를 보며 그를 바라보자 뭐가 웃긴지 푸흐 하며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 고개를 떨군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는 아직 밑으로 향한 체로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나에게 맞춘다. 그의 미소 아닌 미소에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맞잡은 손이 따듯해서 계속 쥔 체로 말이다.